얼마 전 삿포로에 다녀왔다
어쩐지 아직도 삿포로에 있는 기분이 들어서 어색한데
자꾸 일상에 적응해야 할 것 같은 압박이 자주 든다
며칠째 두통이 심해서 약먹고 어깨에 파스를 붙이는데,
( 어깨에 파스를 붙이면 시원해져서 두통이 연해지는 느낌이다 )
가만히 방에서 파스냄새를 맡다 보면 습관처럼
삿포로 사진 정리를 하고, 스캔해둔 다이어리를 물끄럼 보고
아무튼 그러다보면 새벽이 다 간다
송어는 어쩐지 조금 즐거워보인다
나도 송어에겐 어쩐지 즐거워보이는 느낌이라 다행이다
가기 전까지 가장 불안했던건 언제나 그렇듯이
준비하는게 더 행복하면 어떡하지, 였는데
무색했다.
내가 사는 곳에는 눈이 거의 안온다
얼마만큼 눈이 흔하지 않냐면,
동생 태어나던 날 눈이 와서 걘 이름이 雪이 됐다
사는 내내 제대로 된 눈을 한 번도 본적이 없다는게 헤프닝이다
삿포로에는 10일 내내 눈이 왔다
딱 하루 새벽 눈이 덜한적을 빼면
그냥 내내 하늘에서 눈이 내렸다
일본은 열 번도 넘게 다녀왔는데 여긴 그냥 다른나라였다
다녀오면 더 미화되는게 기억일텐데
이번엔 있는 그 순간에 ! 지금 이 순간이
최고로 미화되었다는걸 느꼈다
그 순간을 놓칠까봐 얼마나 종종거렸는지 모른다
엄청 하늘이 까만 밤에 네온사인이 밝은 와중에
가로등을 가로질러 두꺼운 눈이 내렸다
이름 모를 영화 속에 들어와 있는것만 같았다
길을 건널때면 건널목에 키만큼 쌓여있는 눈을 볼 수 있었다
사람들은 신호등을 건너다가도 넘어졌다
오타루에서는 동시에 넘어져서 서로의 일행에게 비웃음 당했다
엄청난 눈바람을 뚫고 먹을 걸 포장해서
지하도를 찾느라 거리를 돌고, 가까운 지하도까지 걷다가
또 풍경에 멍해지고, 지하철에 타서 안심하다가도
조금 슬퍼졌다.
슬프다가 좋았다가. 반복하다 보면 하루가 끝나있는데
생각보다 허무하지 않았다. 그걸 잊고 싶어서라도 일기를 썼는데
그러면 감정이 약간 채워졌다.
자주 우울하고 가끔 즐겁더라도 좋은 느낌이었다.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의 가장 마지막 단락에, 결말에
삿포로가 나온다. 몇해 전 처음 그 책을 읽고
처음으로 삿포로에 낭만이 생겼다.
삿포로가 배경인 영화를 몇 개나 보아도 그만큼의 감상이 안들었다
눈 쌓인 겨울이 배경 아닌 하츠코이는 또 좋았다
그래서
삿포로에 간다면 나는 어떤 모습을 가장 먼저 기억할까. 궁금했는데
소설 속의 삿포로가 가장 먼저 떠올랐다
상상만큼 차분하고 조용하고 느릿느릿하고 그랬다
정말이지 기대만큼 고요했다.
정말 다녀오길 잘 했어
송어에게는 가기 전까지 안 가도 된다고 했는데 ..
말이 가고 싶어 가고 싶다 그런거지, 정말 가고싶은 건 아니라고
여러번 말했는데 아니었나봐 ...
너무 간절한건 정말 간절하다고 생각하는게 무섭다
안될걸 생각해야 마음이 편한 건 어쩔 수 없어

눈축제가 끝난 다음의 풍경을 볼 수 있어서 다행이다
끝난 다음의 모습을 보고 나니
여행이 끝나도 괜찮을 것 같다는 안심이 들었다
가장 화려한 모습을 보는건 어쩐지 무섭다



